미국에서 생활중인 한국인으로서,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을 몇 군데 알아두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맛있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필요로 하는 때에 필요로 하는 음식을 먹는 것인데, 이를테면 실험이 너무 늦게 끝나서 10시쯤에야 뭔가를 먹을 시간이 생긴다면, 그 때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이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다행히 실험실로부터 도보로 15분 거리 내에 이런 한식당이 몇 개 있다. 처음에는 그저 오고 싶었던 학교로 온 것이라서, 시애틀이 어떤 동네인지도 모르고 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래저래 엄청나게 잘 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학교 학생회관 (Husky Union Building, HUB라고 줄여 부른다) 의 푸드코트에 Motosurf 라는 퓨전 아시안 코너가 있는데, 여기서 제법 괜찮은 가격에 괜찮은 퀄리티의 한식을 판다. 그래서 종종 출근길에 들러서 조금 이른 점심을 먹곤 하는데, 최근의 코로나바이러스 이슈로 인해서 여기가 아예 한 달 동안 닫아버렸다. 슬픈 일이다. 할 수 없이 피자를 두 조각 먹고 실험실로 향했다. 이 때의 나는 분명 마음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ㅋㅋㅋ 피자가 맛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일주일에 적어도 4번 이상을 저녁으로 먹다 보면 이건 정말 못해먹을 짓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어쨌든, 대강 오후에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나니 시간이 애매했다. 5시? 아예 저녁을 4시쯤에 먹고 저녁 실험을 일찍 시작하곤 하는데, 5시는 생각보다 애매하다. 5시 이후에 식사를 하면 적어도 한시간 이상이 걸린다. 심리적으로 늘어지고 게을러지기 때문이다. 근데 그렇다고 이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5시에 나와서 30분만에 저녁을 해치우고 다시 파이펫을 잡는 짓은 하지 않는다. 차라리 스벅가서 논문을 읽지.
논문 좀 찾고 커피 한 잔 내려서 마시고 나니까 6시다. 슬슬 배고플 때다. 점심때 먹지 못한 한식이 나름의 한이 되어 머릿속에 남아있던 터라, 막연히 밥을 먹겠노라고 일단 나왔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서 무엇을 먹고 싶은가를 생각해내는건 대충 약간의 의식 같은 거다. 그리고 이 결정은 대체로 횡단보도 두 개를 건너기 전에 끝나게 되어 있다. 언제부터인가 혀가 아니라 배에다가 이 생각을 맡겨놨더니, 뭐가 부족한지(?) 에 대한 해답이 의외로 빨리 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근데 오늘은 죽어도 결정이 안 났다. 이유가 뭘까. 한식을 먹고는 싶은데, 순두부를 먹느냐, 돈까스를 먹느냐, 비빔밥을 먹느냐, 김밥을 먹느냐, 아니면 오징어볶음을 먹느냐의 다섯 가지 선택지 중에서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별로 안 먹고 싶다’ 가 아니라, ‘다 먹고 싶다’ 의 돼지병 말기의 증상이 오랜만에 일어나고 있었다. 음. 어떻게 해야되는건지 한참을 고민했다.
이쯤에서 홍보 아닌 홍보를 하자면, UW 앞의 소위 말하는 대학가에 해당하는 University District (Ave라고도 부름) 에는 그린하우스라는 한식당이 있다. 어찌 보면 약간 한국의 분식집 같은 느낌을 풍기는 곳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 식당을 굉장히 좋아한다. 대체로 평타 이상은 치는 음식 퀄리티도 있지만, 무엇보다 밥이 정말 맛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끔 간과하는 것이 있다. 바로 밥이 얼마나 맛있느냐 라는 것.
고깃집에 가면 고기가 우선이다. 된장찌개와 함께 나오는 공깃밥은 사실 맛을 따지지 않는다. 아니, 맛이 어땠는지 아마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특출나게 밥이 맛있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런데 일상 생활에서 일반적으로 먹는 식사의 경우는 밥이 중요하다. 반찬이나 메인디쉬가 아무리 맛있어도 밥이 엉망이라면 좋게 기억되기가 어렵다.
내가 처음 유덥에 왔을 때, 이 그린하우스에서 바로 반 블럭 떨어진 곳에 사시는 박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거기서 늘 뭘 테잌아웃 (to-go라고 한다) 해 와서 함께 점심을 먹곤 했었는데. 생각보다 입맛을 따지는 분이어서, 그런 양반이 왠일로 꾸준히 먹는구나 싶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꾸준히 먹을만큼 괜찮은 곳이었다는 얘기도 된다. 그래서 한 번 가보고는, 특별한 일 없으면 한식 먹고 싶으면 대체로 이 곳으로 간다.
밥이 질지도, 딱딱하지도 않고, 갓 지은 밥마냥 찰기와 온도가 완벽하다. 나도 밥 자체는 잘 하는 편인데 (물론 밥솥이 하지만) 이렇게까지 잘 하는 건 처음 봤다. 늘 사람도 많고, 나 같은 단골도 제법 된다. 동양인이 아닌 친구들이나, 혹은 한국인이 아닌 동양 친구들이 한식을 물으면, 나는 그래서 항상 이곳을 추천한다. 한식의 기초는 밥이고, 그 기본기에 가장 충실한 식당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식당들은 자주 교체된다. 망해서 바뀌는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중에서도 꾸준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면. 적어도 이 ‘기본에의 충실함’ 이 그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역시, 뭘 하든, 뭘 먹든, 뭘 쓰든, 항상 중요한 건 기본이다. 만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만 번 실행해도 부족하다. 기본기를 강하게 튼튼하게 가져가는 것은 살아가면서 모든 면에 갖다 붙여도 전혀 과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UW에 오시는분들은 한식이 드시고 싶으시면 유딕의 그린하우스 (Green House) 에 꼭 가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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