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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 멤버들과 해피아워를 가지고 나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다.

일해야 할 거리가 좀 있었는데, 날씨가 너무 좋기도 했고, 드디어 저녁이 되어 선선해지기 시작해서 (요즘은 시애틀도 낮에는 쪄죽을 듯한 느낌이 있다) 오피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Dr. Choi와 함께 유빌의 스타벅스에 가서 바깥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일을 너댓시간 정도 하다 왔다.

 

최근 들어서는 가급적 커피를 안 마시려고 하고 있어서, 대신 스트로베리 아사이를 한 잔 샀다. 아메리카노는 사실 3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즐길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였는데, 이게 어째 전반적인 내 건강에 (적어도 수면 사이클에)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상황 (이를테면 밤을 넘어가는 실험을 한다거나) 이 아니면 자제중.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유빌 몰을 죽 둘러보고는 뭔가 기분이 묘해졌다. 너무 평화롭다고 해야 되나, 약간의 이질적인 느낌이 덮쳐왔다. 

Photo taken at Starbucks in University Village Mall, w/ iPhone XR

생각해보면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정말 죽어라 치열하게 살았다. 초, 중, 고, 재수, 대학, 석사, 그리고 연구소에 이르기까지, 장장 20년 이상의 시간을 정말 여유없이 쫓기며 살았다고 생각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10대를 보냈고, 재수도 했고. 대학을 가서는 대학원 및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서 + 즐거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별 활동을 다 하고, 학점관리도 나름 열심히 했었다. 동시에 경제적인 부분도 가지기 위해서 학교 다니면서 여러 일을 했었고, 대학원 다닐 때에는 논문을 좋은 저널에 내기 위해서 나름 빡세게 살았다. 연구소에 들어가서는 더더욱이 좋은 연구와 실적을 냈어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동시에 미국으로 박사유학을 가야 했기 때문에, 공부/연구/일/준비를 동시에 해서-- 모든것이 다 혼재되어서 죽을 것 같은 3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박사 유학을 오고 나니, 분명 약간의 괴리가 있긴 하지만. 이 생활을 누리기 위해 그 긴 시간을 투자했구나 라는 게 느껴진다. 항상 1등이 되어야 한다, 항상 뛰어나야 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의 의식이 항상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그 시간들에서 이제서야 비로소 벗어난 것 같다. 

 

물론 정신이 해이해져선 안 되겠지만. 아무튼, 그 평화로움이 갑자기 나를 덮쳤다.

이상하더라.

 

모두가 딱히 뭘 하고 있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풍경. 이게 왜 이렇게 어색했던걸까.

카이스트에서 지낼 때에도 이런 광경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들을 감싸고 있는 그 공기가 달랐다 말하는 게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여유가 몸에 밴 사람들의 모습, 그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앉아서 하늘을 보거나, 이야기하는 광경. 당장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리고 정말로 내일 일을 내일 걱정하는 모습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확실히 훨씬 더 느슨하고 편안하다.

 

이런 상황에서 느끼는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바로 내 사고와 생각의 변화에 있다.

 

오래 전에 읽었던 글 중에, 'life is a journey, not a destination' 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거 참 좋은 구절이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에서의 삶들 때문에 아무래도 결과주의와 성과주의에서 벗어나질 못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연구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좋은 데이터를 항상 가지고 가야 하고, 나쁜 데이터는 약간 죄 같은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혹은 덜떨어진 느낌? 뭐 이런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데.

 

실험은 사실 원래 잘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건데 말이다.

 

요즘 미팅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괴상한 데이터를 슬라이드에 싣는다. 대신 이걸 가지고 해석과 디스커션을 많이 한다. 아, 물론 그런 거지같은 데이터를 선호하거나 좋아하는 건 아닌데, 모를 일이다. 과학을 한다는 것은, 수많은 실패를 분석하고 그를 딛고 나아가 성공을 향해 가는 것이다. 좋은 데이터만을 보여줘야 되는 건 아니다. 그건 대외적으로 나를 홍보할 때 필요한 것이지, PI와 토론할 때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 것만을 보여줘서는 배울 수 있는 것도, 성장할 수 있는 룸도 없다.

 

오늘도 뭔가 좀 떨떠름한 데이터로 발표를 했고, 교수님께서는 이거 아무래도 재검증이 필요할 데이터 같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왜냐면 과거의 비슷한 샘플로부터 얻은 데이터들과 현재의 내 데이터가 매칭이 안 되기 때문이다. 누가 틀렸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를 먼저 보자. 이유를 찾아내고, 그를 배경으로 더 나은 곳으로 가기 위한 초석으로 삼자.

 

이런 식의 사고들이 모여, 나로 하여금 보다 더 나은 과학자가 되도록 해 준다고 믿는다. 나태해지지만 않으면 된다.

 

동시에 배움의 기회가 생각보다 많이 열려 있다. 최근들어 코딩과 Statistical Analysis 툴을 하나 배우기 시작했다.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이 바뀌는 것.

 

이게 미국 나와서 얻고 있는 가장 큰 수확인 것 같다.

 

열심보다는 여유. 조급함보다는 한적함.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결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실패를 분석하는 것.

 

아마 근래 들어 겪었던 슬럼프는, 이를 통해 성장하려는 내 인생 단계이자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눈 앞의 괴로움이 커도, 그 길이 결국 가장 좋은 길로 이어질 것을 알고 믿기 때문에,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내 인생에 대한 걱정은 그나마 덜 한 것.

 

과연 어디까지 성장하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

나의 30대를 모두 걸고 진행중인 science game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줍고 획득하는 것들이 정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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