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강의했던 과목의 마지막 섹션에서, 1학년 학생들에게 꼭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묶어서 '내가 대학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이라는 이름의 서브토픽으로 막강을 진행했었는데, 이 강좌를 준비하면서 반드시 포함하려고 했던 것이 글쓰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생각했던 것 만큼 많이 이야기해주지는 못했기에 아쉬움이 남아, 여기에라도 다시 써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전공이 무엇이건간에 "제대로 된 박사가 되려면" 글쓰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이건 성향 같은 걸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에 해당합니다. 글쓰기를 못 하는 박사는 경쟁력이 없고, 박사의 핵심 가치중 하나가 결여된 사람입니다.
논문은 교수님이 써 주는 것이라고 트레이닝 받은 분들이 계시다면 그 생각을 하루빨리 고쳐야 합니다.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실험을 하고, 결과를 분석하고, 그걸 토대로 다시 가설을 재정비하고, 결과를 내고, 결론을 내어 논문을 출판하는 과정은 모두 글쓰기를 토대로 합니다. 말로 해서 아는 것과 그걸 글로 생산해내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는 남에게 설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본인의 것이 되었다 말할 수 있는데, 박사는 나의 연구를 널리 알릴 수 있는 능력 또한 있어야 합니다. 은둔 고수 같은 건 무협지에나 나오는 환상이고, 근현대 및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학자라 일컬어지는 이들은 모두 글쓰기에 능했으며, 말하기 또한 능숙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학자는 반드시 글쓰기에 능해야 합니다. 박사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글쓰기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닙니, 박사과정을 진행해감에 따라 글쓰기 능력이 늘어야 합니다.
반드시 위대하고 예쁜, 아름다운 글을 써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처음부터 그러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영어도, 한글도, 쓸 수록 늘게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영어로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은 한글로라도 글을 쓰는 것을 습관화 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어가 서툰 것이 아닌 다음에야, 영어로 글을 잘 쓰려면 일단 한글로 글을 잘 써야 합니다. 한글로 글을 잘 못 쓰는데 영어로 잘 쓰는 경우는 단언컨대 없습니다. 글쓰기는 용어 사용 이전에 흐름과 논리구조를 짜는 능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마이클 폴라니는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암묵지의 정의이며,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행동과 생각에 지속적으로 양방향 피드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주장입니다. 암묵지를 많이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박사를 하는 우리에게는 이 암묵지와 명시지를 제대로 실체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글쓰기를 좋든 싫든 무조건 해야 하며, 꾸준히 해야 하며, 종국에는 즐길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은 생각을 정리해주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합니다. 내 머릿속에 뒤엉켜있는 지식과 생각들을 토해내는 과정에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던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암묵지를 체화된 지식에서 실체적 지식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때로는 이것이 고통스러운 작업일 수 있습니다. 다만 동시에 어떤 형태로든 '결과' 가 남는 작업입니다. 그 결과를 다시 보고 검토하면서 지속적으로 이 결과를 향상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글쓰기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오늘, 지금 당장 시작합시다. 길지 않아도 됩니다. 두세줄부터 시작해서 결국 책 한권이 되는겁니다. 박사 논문이 될 지, 아니면 네이쳐나 사이언스에 나갈 글이 될 지, 아직 아무도 모르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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