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활기

수업조교 (Teaching Assistant, TA) 의 무서움에 대하여 (feat. RA는 천사였다)

쉘딘 2023. 2. 27.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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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학원의 펀딩 종류는 대체로 4가지 정도가 있는데, Research Assistantship, Teaching Assistantship, Fellowship, Scholarship 정도라 하겠다. 나는 당초 받았던 오퍼가 Research Assistantship이었는데, 이제 5년이 지나기도 했고, 몸담고 있는 랩에 펀딩이 바닥나는 중이라 TA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와서 신나게(?) 하고 있다. 학과 졸업 requirement에 TA 1회 이상이라는 조건이 붙어있기도 해서 이차저차 하는 중인데, 이번학기는 TA도 아니고 Pre-doc Instructor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TA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의 업무프레셔를 겪는 중이다. 

 

 

원래 다른 교수양반이 하던 수업인데, 이게 문제가 이양반이 수업자료를 제대로 안 넘겨줘서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두어달만에 수업을 새로 디자인하고 자료도 다 만들어야 했다. 아니 현재진행형이다. 어쨌든 쿼터가 지나가는 중이니까.

1학년 engineering pre-major 학부생들 수업인데, 장단이 너무 명확하다. 장점은 내가 그동안 공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과 insight들을 내 식대로 풀어내서 가르치고, 피드백을 받고 소통할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본래 어떤 개념을 설명해주거나, 구체화시키고 가르치는 데에 재능이 있었어서 이번 기회를 나름 즐겁게, 그러나 고통스럽게 이용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괴로운 것은- grading이다.

내 밑에서 일하는 TA가 4명인데, 얘내는 Lab 세션을 맡고 있고, 이들도 매주 50편 가량의 그레이딩을 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그레이딩을 맡기기엔 너무 미안하다. 그러나 나는 본업이 lecturer가 아니라 박사과정이기 때문에, 내 연구도 해야 되므로..... 결국 밀리고야 말았다. 지금 새벽 5시인데 겨우 Assignment 2 그레이딩 끝내고, 100편 넘게 남은 위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일 강의자료도 만들어야 하는데 갈 길이 멀다.

Besides, 강의를 해 보는 건 그럼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분명히 많은 도움이 된다. 내가 강의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그리고 학생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기싸움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언제 물러서줘야 하는가. 그들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가 (소위 말하는 요즘 것들에 대하여), 또 이 세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내가 가진 교육적 철학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가 되고, 더불어 실제로 교수가 된다면, 교수가 아니라도 미국에서 미국인들을 가르치게 된다면, 그리고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면 티칭은 반드시 필요한 경험이다.

 

개인적으로, 이 수업을 하면서 느끼는것이지만 정말 잘 따라오는 학생 서너명만 있으면 충분한 동기부여가 된다. 다행히도 정말 맘에 드는 학생들이 몇 명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조언을 구하러 오는 친구들인데 기꺼이 내가 시간을 할애하여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조언을 해 주는 편이다. 다만 정말 조심스럽게 되는 것이, 그들이 직접 판단하기 전에 내가 어떤 스테레오타입을 심어주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하여 최대한 fair하게, bias 없이 이야기해주고, 그들이 판단하도록 열어두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내 의견이 필요한 경우는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야기해준다. 물론 객관적이라 함은 팩트를 기반으로 다소 냉정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학생들이 항상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실이 어떤지를 미리 알려줄 수 있다면, 그리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희망적인 말로만 학생들을 꽃밭에 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러분에게 티칭의 기회가 있다면 주저 없이 경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여러분의 흥미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네트워킹을 할 기회도 되기도 하며, 무엇보다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이 많다. 나는 그들에게서 여러 가지 공학적 솔루션의 창의적 영감을 얻을 기회가 많아서 더더욱이 이 수업을 즐기는 듯 싶다. 나중에 종강하고 나면 따로 유튜브로 만들어서 공유해보고자 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RA가 제일 좋다. 이대로는 연구하고 실험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펀딩이 있고 RA가 보장되는 한, 그 시간을 간혹 free salary 로 여기는 분들이 있을텐데, 절대로 그러지 않길 바란다. 그 시간이 엄밀히 말하면 여러분이 온전히 연구와 실험에 집중할 수 있는 정말 황금같은 기회다. 나중에 연구실 펀딩이 떨어져서 TA로 연명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 때부턴 정말 연구를 하고 싶어도 제대로 못 하게 되는 상황이 온다.

 

현명한 사람은 기회를 소화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기회가 지나간 다음에야 그것이 기회였음을 안다. 유학까지 나가려는 분들이, 그리고 유학 나올만큼 열심히 살았던 분들이 그런 실수를 범할 확률은 낮지만, 간혹 유학을 나왔으니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보상심리가 작용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경계하라는 뜻에서 남겨본다.